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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n Blanket

  • 전시기간       2020-11-18 ~ 2020.12.27
  • 장소 

​뮤지엄 다: 2층 기획전시실

  • 작가     

김건일

  • 주최             col.l.age+, 쿤스트원
  • 주관             뮤지엄 다:
<기억하고 욕망하는 자들의 숲>​
김 노 암 (미술 평론가)

 짙푸른 숲과 물이 반복해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화면을 촘촘히 채운 숲과 녹색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오지의 밀림처럼 보인다. 단일한 칼라와 단일한 소재가 그림의 크기만 다를 뿐 반복된다. 이러한 반복은 몰입이자 동시에 강박으로 보인다. 그의 그림을 찬찬히 보면 한 그림 속에 어떤 부분은 초점이 선명하게 맞춰져있고 또 어떤 부분은 흐릿하게 뭉개져있다. 한 화면에 이렇게 선명함과 흐릿함이 또는 명징하거나 애매모호한 것이 동시에 공존하며 반복된다. 녹색의 이미지는 구체성과 모호함이 공존하면서 사색의 시간과 공간을 제공한다. 나무나 물의 형상 보다 녹색이 더 중요한 요소로서 우리의 시선을 덮어버린다. 

 작가는 풀과 숲을 그리는 과정을 기억과 욕망의 운동으로 이해한다. 어떤 기억은 선명하고 어떤 기억은 이내 망각의 지대로 들어가 버려 사라져버린다. 작가가 말하는 기억과 욕망의 숲으로서의 이 이미지는 미세한 떨림과 운동과 방향과 크기와 긴장이 뒤엉킨 밀림이다. 숲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이다. 이 숲은 일부가 떨어져 나오면 이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는 불모의 존재가 되어버린다. 작가의 주요 키워드인 기억과 욕망은 실상 그 의미와 쓰임의 용례나 범위가 너무도 거대하여 어떤 지점을 포착해서 이해해야할지 의아해진다. 작가는 작은 존재들 그러니까 잡풀이나 이파리를 삼켜버린 숲의 거대한 녹색지대는 마치 작가 자신의 기억과 욕망이 잠시 반짝 존재했다 이내 망각되는 경험을 재현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기억과 욕망은 막연한 의미로서의 키워드가 아니라 자신의 실존과정에 체득되는 경험의 딱 그만큼의 질과 양을 지닌 것이다. 이 매우 구체적이고 촉각적인 것들이 김건일 특유의 녹색의 숲으로 표상된다.

 그런데 관객은 입장이 다르다. 존재의 각도와 운동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작가와 다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관객은 타자이고 관객에게 작가는 또한 타자인 것이다. 이 타자들간의 만남은 녹색의 숲의 이미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 접촉의 사건은 엄청난 운과 조건 속에서 가능할지 모른다. 관객은 작가의 말과 하등 상관없이 그저 눈앞에 주어진 녹색의 지대를 확인하고 그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투사한 또 다른 경험과 해석의 차원으로 진입해버리지 않는가. 기억은 작가 개인의 기억에 머무는 문제가 아니라 녹색과 숲과 숲이 반영된 물이라는 이미지를 매개로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기억과 접속하거나 분리되어 버린다. 아주 구체적인 사거이나 언어적 기억이 아니라면 모든 거대한 보편적 기억은 개인의 기억이 아닌 존재의 차원, 지구적 차원의 기억이 되어 버린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을 떠올려보면 물론 그것은 은유이지만, 한 개인의 의식이 욕망과 기억의 반복 속에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지구에 등장하기 시작해 미래에 사라질 운명의 인류사 전체를 ‘은유적’으로 반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는 김건일 개인의 기억과 욕망이 체현된 녹색의 숲은 실상은 나무 위 야행성 존재가 어느 순간 대지로 뛰어내려 두발로 우뚝 선 인류의 기원을 품은 숲이기도 한 것이다. 김건일의 이미지는 그 개인의 기억과 욕망으로 구성된 꿈의 이미지라고 볼 때, 그의 숲이 품은 이미지는 김건일 개인의 꿈을 넘어서 인류의 꿈으로 확장되어 버린다. 숲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역사를 그리고 자신의 꿈과 비전을 시작한 곳이고 또 매 순간 되돌아가길 꿈꾸는 곳이기도 하다. 김건일은 미세한 붓질과 채색의 과정에 경험하는 살아있음의 순간들을 온전히 담아내려고 하지만 결국 그것은 꿈과 같은 차원의 사건으로 귀결될 운명인 것이다.

 지구가 호흡하는 폐로서 거대한 녹색의 숲은 그러므로 인간의 호흡을 선취한다. 인간의 호흡은 물고기가 물에서 나와 공기를 호흡하는 과정을 매우 성공적으로 모방한 결과인 셈이다. 작가가 긴장이 팽배한 순간들이 모인 이미지를 연출하는 방식은 마치 군대의 진지전이나 길고 지루한 힘겨루기를 하는 외교전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리 어둡지 않다. 왜냐하면 녹색이 주는 분위기는 결코 어둡지 않은 순간을 약속하는 것처럼 소곤거리니 말이다. 숲은 어두운 현실을 견디는 희망이나 꿈 등을 은유하는 창처럼 네모나 화면을 촘촘히 채우는 녹색으로 재현된다. 역설적으로 꿈꾸는 자들의 현실은 그리 불행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운명의 이상한 인과의 고리는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우연한 연쇄를 통해 이루어진다. 생명체는 물론 돌맹이도 그 자리에 있으려고 욕망한다는 이야기처럼 ‘존재의 운동’의 다른 말이 ‘욕망’은 결코 망각될 수 없다. 단지 망각된 것처럼 보일 뿐이다. 기억과 망각은 사실 동전의 양면처럼 작동한다. 기억하기 위해서는 신이 아닌 인간은 제한된 능력으로 방법 없이 망각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동시에 무언가를 망각하는 것이다. 이 이중의 운동이 동시에 벌어지는 것은 의식이나 의지적 차원이 아닌 존재적 차원의 것이니 말이다. 

 숲은 작가의 기억과 욕망을 담을 뿐 아니라 지구와 자연과 인류사를 담는 그릇이다. 이 숲이 작가와 관객에게 소곤소곤 말을 걸고 진동한다. 우리는 그러한 대화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너무 바쁘게 약동하는 사건의 연쇄 속에 인류의 조상이 가지고 있었던 어떤 비상한 능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건일의 녹색의 숲은 인류의 조상이 동물의 단계에서 사유하는 존재, 노동하는 존재, 관계하는 존재로 도약하는 순간의 기억과 욕망의 운동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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